⭐⭐⭐

 

강영안 교수님의 최근 책들은 대중을 위한 책들이 많은데, 이 책 역시 결을 같이 한다. 학창시절 수업에서 받았던 인상 때문에,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지, 혹은 그간 나의 내적 든든함이 더 해진 까닭인지, "읽는다는 것" 그것도 "성경"을 읽는 행위에 대한 통속적인 "묵상법"을 소개하는 책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게다가 "우리들교회"의 묵상의 "철학적, 신학적" 지지 기반을 마련해 달라는 주문에 참으로 철저한 책이라서 밋밋했다.

머리말의 문제제기와 책의 구성에서 잔뜩 부푼 기대가 책을 덮는 순간 꺼지는 느낌이랄까?

 

읽기 전에 추천한 이들의 촌평을 읽고, 읽은 후에 다시 읽고 나니, 이분들의 촌평이 교수님이 새겨 넣은 무늬에서 조금 동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읽는 행위와 의미 구성, 현대 해석학의 지형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위로가 되고, 주희의 독서법과 루터의 성경 독서에 관한 연구가 눈에 띈다. 

성경에 대한 입장은 날카로운 철학적 논증과는 전통적이고, 주관과 객관적 읽기의 균형을 제안 하지만, 그 균형을 이루어 내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여전히 부유한다. 학자들의 비평적 읽기 습관이 참살이를 위한 읽기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는데, 교수님 역시 이 책 내내 그 학자들의 읽기에 길들여져 일반 대중들의 가슴을 울리는 평이함의 조정을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도리어 내게는 몸으로 읽어내는 말씀을 역설하면서, 인용한 유진 피터슨과 바르트의 일갈이 마음에 든다. 

"성경을 읽어야 하는 까닭은 피터슨의 이야기와 바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새로운 세상" (the strange new world)으로 나가는 문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 241)

딤후 3:15-16이나 히 4장의 성경에 관한 말씀의 핵심은 온전한 사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책이 성경이란 사실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크로노스적 종말에 "구조"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놀랍고도 새로운 세상"의 질서로 오늘을 사는 데 있다는 게 아닐까? 성경은 분명 그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창문이다. 새 세상에 대비되는 옛 세상의 질서로 나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열어주신 새 세상의 질서로 구성하여 살아가는 구원 말이다. 이게 "영혼" 구원이라면, 의심없이 동의다. 

성경이 "책들"이라는 관점에서 "상호텍스트성"에 주목하고, 한 책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으로 묶여 있는 책들 간의 소통의 중요성을 지적한 부분은 도대체 교수님의 지적 경계가 어디일까 묻고 또 묻게 한다. 하지만, 상호텍스트성을 말하면서, 이후에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를 상호텍스트성의 울타리 밖의 연구로 친 것은 성경 본문이 끊임없이 일반사와 소통한 결과라는 측면을 고려하면, 조금 아쉬운 게 사실이다. 정경 내의 상호텍스트성에 의해, 하나의 책의 의미가 구성되듯, 하나의 책이 당시의 문화와 갖는 상호텍스트성을 판별하고 인식함으로서 구성된 의미에 더 분명한 결을 더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두서 없는 내 감상은 이 정도로 하고, "읽는다는 것"은 결국 "사는 것"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내가 충만한게 담아내고 경험하는 것이라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