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짐 월리스 지음, 정모세 옮김/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회심'이라는 단어나 '회개'라는 단어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말이다. '회개'는 '죄'라는 단어와 병행해서 등장하곤 하는데 뭐 새로울 것이 있겠는가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소위 정치적 '좌파'로 분류되는 복음주의자인 짐 월리스가 말하는 '회심'이니 한번 읽어보아도 손해는 없겠다 싶었다. 다 읽고난 지금 내 짐작이 맞았다는 확신 뿐이다. 회심은 말그대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그 돌이킴을 위해서 교회는 지금도 애를 쓴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돌이키되 무엇을 향해 돌이키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다. 용서를 구해서 죄사함을 받고 나서 무엇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참 드물다. 짐 월리스는 그 이유를 "영적"인 해석에서 찾는 듯 하다. 회심도 영적인 사건이고 사적인 사건이어서 '역사'와는 무관한 '영혼' 비즈니스라는 것이다. '한 영혼을 구한다'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고 있지만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죽어서 천국에 보내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교회를 만들고 소위 세속적 권력 유지에 기여하는 것인지 그는 철저하게 파헤친다. 그래서 그의 관심 역시 예수를 만난 처음 세대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관찰하는데로 이어진다. 그들은 분명 회심을 경험한 세대였다. 그 회심이 단순히 영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성육신적'인 생활과 공동체의 형식으로 드러났고 드러난 형식은 당시의 세속 권력과 문화에 가시가 되었다. 대안적 공동체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누가 보아도 '저녀석들은 달라' 할 수 있는 생활방식이나 관습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을 '그 도'(the way)를 따르는 자로 일컫는 데 '도'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구체적인 생활방식과 윤리성이 존재했음을 반증한다. 그는 이런 역사적 실제를 염두하고 성경적 회심을 연구하는데 이 역시 같은 것을 증언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성경적 회심의 목표는 역사와 별개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그 폭발적인 힘과 함께 세상으로 가져오는 것이다.(p. 4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긍휼(compassion)은 단순한 관심(concern)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다.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질적으로 다른 삶을 산다. 긍휼과 관심의 차이가 그렇다. 관심은 누구나 가질 수 있으나 긍휼은 자기 고통을 감내해야 하기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게 연민과 측은지심의 차이가 아니던가! 그러나 지금의 교회(짐 월리스의 비판은 미국 보수복음주의 교회를 향한다)의 모습은 관심만 있으며 '평화'를 사랑할 뿐, 세속 권력과 아무런 상충됨도 없이 서로 상보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어때서? 잘 살아가며 배를 쓸 동안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경제적 부조리와 전쟁과 살상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으니 짐 월리스는 딴지를 거는 것이다. 회심의 공동체적 차원이나 인격적 차원, 역사적 차원의 회복 없이는 교회가 교회다울 수 없으며 세상의 부조리에 기여하는 악의 방조자, 혹은 동조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예수는 구원자시다"나 "예수는 주님이시다"와 같은 구호들은 너무나도 자주 어떤 가시적인 역사적 적용 없이 사용되었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그런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되었다.(p. 58) 교회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벌어지는 군상들이 발견될 수 밖에 없다며 자위하기 일쑤인 우리에게 월리스는 회심한 자들이 모인 공동체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회심한 공동체가 교회라면 우리의 모습은 분명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의 교회가 왜 다른 공동체와 다르지 않고 때로는 더 악한 모습으로 비쳐지는가? 제자도를 거져먹으려는 심산으로 모여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말을 인용하며 말한다. "예수께서 한 사람을 부르실 때, 그 분은 자신에게 와서 죽기를 청하시는 것이다"(p. 144) 지금의 풍요를 벗삼아 사는 우리에게 이 얼마나 당혹스런 도전인가. 심리적 안정과 풍요를 누리기 위한 사람들이 모이 곳이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원래 모습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희생을 각오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다. 그래서 교회는 저항이라는 단어와 어울리고 그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비전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로 세움받았다. 특별히 본서에는 교회가 저항해야할 주제로 "빈곤의 문제"와 "폭력과 전쟁의 문제"를 거론한다. 21세기의 화두가 "경제"인 것을 보면 교회는 그 경제가 바로 움직이도록 하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9/11테러이후 벌어지고 있는 전쟁 역시 교회가 목소리를 높혀 평화를 구가해야 할 이유가 된다. 그러나 어느 교회가 빈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폭력의 문제에 관심갖고 있는가? 변변한 성명서 조차 발견할 수 없는 것이 지금의 교회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이다. 세속적 공동체의 정치적 활동과 교회의 저항이 다른 이유는 교회의 저항은 하나님의 법에 근거하며 그 동력을 예배 가운데서 얻기 때문이다. 활동의 구체적인 모습은 교차할 수 있으나 교회의 저항은 높은 현실의 벽 앞에 실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교회는 궁극적인 소망을 다윈적인 사회발전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근거한 때문이며 예수의 부활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나의 '회심'은 어떠한가? 어디로 돌아섬인가? 회심의 방향성은 분명하며 이것을 인식하고 있는가? 나는 희생을 감수할만큼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있는가? 예수의 부활을 내 것 삼고 있는가? 생각할 꺼리들이 넘쳐난다. 바로 『하나님의 정치』를 읽기 시작해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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