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죄책감과 은혜 - ![]() 폴 투르니에 지음, 추교석 옮김/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각설하고 제목에서처럼 죄책감과 은혜는 다분히 종교적인 언어이다. 다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죄책감이라는 단어보다는 죄이지만 여전히 죄책감은 죄를 포함하거나 연상시키는 단어이니 은혜와 조합될 때 대충은 무슨 말을 할지를 가늠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을 목사님이 아니라 의사 선생님께서 하시니 파격이 되고 신선하게 들린다.
투르니에는 정신 분석을 통해서 얻은 죄책감의 실체를 다양한 관점과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조망한다. 열등감과 연루된 죄책감, 부와 관련한 죄책감, 태만으로 부터 오는 죄책감 등 우리 삶의 다양한 모습 속에서 죄책감이 자라날 씨앗들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은 이 죄책감으로 부터 자유한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 내면을 옥죄는 죄책감을 기만하거나 슬며시 무의식에 뭍어 두고 정상인 척 하며 살아갈 뿐이다. 자신의 내면에 웅크린 죄책감을 기만하는 기본적인 방식은 비판이며 비난이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 쏟아놓는 비판과 비난을 통해서 나의 죄책감은 도덕적 우월감 뒤로 숨게 된다. 이 순환이 선순환일 수는 없다. 은폐된 죄책감이 커질수록 비난의 강도가 비례하여 세지며 자연스럽게 비난의 대상은 희생되고 무의식 속에서 곪아가는 나의 내면 역시 죽어버리고 만다.
나를 무너뜨리고 이웃을 무너뜨리는 이 죄책감은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은폐된 죄책감은 폭로되어야 치유가 시작되는데 우리는 죄가 폭로되는 것은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에 늘 불안해 하며 죄책감을 키운다. 사실 프로이트는 죄책감의 기원을 유아기에 부모님께 사랑을 받기 위해 지켜야 했던 법칙을 어기는 데서 오는 감정에서 기인한다고 보았고 도덕주의가 죄책감을 조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투르니에는 도덕주의 혹은 행위로부터 오는 죄책감의 치유는 근본적인 치유일 수 없고 존재 혹은 의도로부터 오는 죄책감의 치유가 근원적인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성경에서 보듯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선포의 차이라는 것이다. 선지자들의 선포 속에는 개별적인 죄들이 아니라 존재의 차원, 즉 창조자와의 관계가 관심이다. 그래서 우리의 관심은 개별적 죄들(sins) 아니라 죄성(sinness)이 되어야 한다. 성서에 나오는 사죄의 선언들은 죄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로 죄성에 대한 사죄선언이다. 그러나 사죄의 선언은 자신의 죄성을 의식할 때, 은폐된 죄책감이 폭로될 때에야 들려오는 은혜의 소리이다.
자신의 죄가 아닌 죄성에 대한 각성이 곧 회개요 돌아섬이다.
교리화되어 버려 힘을 잃은 죄성에 대한 자각과 은혜의 체험이 투르니에의 정신분석학적인 언어를 빌어 다시 확증된다. 그의 비판은 개신교회가 죄성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개별적 죄들에 대해 더 마음을 쓰고 강조한 결과 도덕주의로부터 비롯된 죄책감만을 조성하고 한편으로는 지킬수 있는 도덕률을 통해 자기의를 키워 직면해야 할 죄성을 덮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신교회의 특징만이 아니라 인간 공통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킬만한 것들을 지키며 도덕적 우월감을 누리는 것. 자신의 죄성을 자각하는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친다.
그러나 그 은혜가 값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제로 믿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이 한번더 문제를 복잡하게 한다. 우리는 왜 공짜라고 하는 그 은혜를 거부하는가? 세상에는 공짜는 없으며 무엇인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내 입장에서 이정도는 해줘야 은혜를 경험할 만한 자격이 생긴다고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과연 그런가?
하나님은 은혜를 '선물'로 주시지 않았는가? 자격있는 사람들을 찾아 허락하는 은혜가 아니라 자격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다.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함을 누리며 보다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우리의 죄성을 고백하는 그 자리,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그자리에 서 있는 사람만이 조건없이 맞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는 완전히 죄책감을 걷어내지는 못하지만 용납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투르니에의 책은 일전에『모험으로 사는 인생』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지하철 용으로 읽기에는 난해한 책이었는데 무리하게 지하철에서 읽다가 흥미를 잃어버린 이유다. 이번에 이 책을 읽어보니 스캇 펙보다는 난해하지만 성경이해를 넓혀주는 바가 있어 개인적으로는 즐겁게 읽었다. 그리고 본문 상에 많은 의사들이 언급되는데 의사가 아닌 철학자로서 단연히 돋보이는 인용은 폴 리쾨르다. 리쾨르의 인용마다 밑줄을 그을 만큼 몇단어에 담아낸 촌철살인 같은 메시지에 압도당했다. 인용한 리쾨르의 책이 있는지 검색이나 해봐야겠다.
죄성과 은혜의 관계를 객관적인 언어를 통해 듣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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