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 버린 것들(Judas and the Gospel of Jesus, N.T Wright, Baker 2006)
from 밑줄 긋는 남자/읽어 버린 책 2009. 1. 24. 09:54
라이트의 글을 오랜 만에 읽는다. 이 책 역시 새해 벽두에 비행기를 타셨던 분의 선물로 손에 넣은 책이므로 감사한 마음을 가득 안고 빠르게 읽었다.
제목으로 봐서도 알겠지만 영지주의 문서인 유다복음서의 발견으로 빚어진 한바탕 소동에 대한 비판서다. 전체적인 깊이에 있어서는 가볍다는 인상을 받았고 이미 대학원에서 Robinson교수의 글을 본 적이 있는 터라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꼼꼼하게 읽으며 라이트만의 표현을 찾아보고도 싶었지만 집중해서 책을 읽고 시간을 보낼 만한 상황이 아니므로 패스!
유다는 정경에서 예수를 판자로 그려진다. 요한은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가서 그런 무지한 짓을 했다고도 하고 마태, 누가는 잔인하게 목매달아 떨어져 창자가 배밖으로 터져 나와 죽었다고도 전한다. 유다의 배반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는 전통이 2000여년을 지속해 왔는데 그걸 뒤집는 2세기 문서가 나왔으니 안티팬들에게는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반가울 수만은 없는 것이 이 문서의 저작연대는 2세기이며 그 내용과 구성에 있어서 영지주의 문서로 분류된다. 영지주의라면 유대교적 하나님을 열등한 신으로 무시하고 창조세계는 악하여 이 세계를 탈출하여 자기 안에 있는 신성과 본래적 신성과 합일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앙 체계 혹은 철학 체계라 할 수 있다. 극단적 이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이들의 이해가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이단시 되었던 것은 여러 역사적 문서가 지지한다.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는 하지만 유다에 관한 영지주의적 해석, 즉 예수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신성과 합일을 위한 진정한 지혜(Gnosis)의 계시자였고 세상에서 탈출을 위해 협조한 유다는 진정한 제자였다는 주장은 이미 그 이전 문서부터 간접적으로 반박되어왔다(이레네우스, 이그나티우스).
2000년이 지난 지금 일부 학자(북미학자)들이 유다복음에 목을 메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은 북미의 상업지상주의를 꼽아야 한다. 처음 유다복음서를 Lost Gospel이라는 제하로 출판한 곳은 자연 다큐멘터리로 명성이 있는 National Geographic사이다. 음모이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유다복음서는 베스트셀러감이다. 얼마나 멋진 구성이 되겠는가? 유다복음서가 정경화에 밀린 이유는 당시 교부들의 파워게임이 있었고 유다복음서는 그들의 권력을 구성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역사는 파워게임이건 뭐건(십분 양보해서) 정경의 복음서를 읽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많은 순교자들을 알고 있다. 유대적 하나님과 역사인식,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세상가운데서 시저가 아닌 다른 주를 모시다가 스러져 간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다.
시점이 절묘한 것이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인 핍박을 받는 시점에서 영지주의 문서들이 창궐하였다는 거다. 영지주의 문서는 제국에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는다. 왜 안그렇겠는가? 세상은 악하니 내 관심이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신성만 발견해서 죽으면 그만인 것을...
라이트는 영지주의의 근본을 파헤치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북미신학에서 유다복음서가 관심받는 이유를 미국의 사회분석을 통해 드러낸다. 보수 우익 기독교가 미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권세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일반적인 정서는 그 권위를 거부하고 있고 지난 2세기동안 미국의 기독교의 경직성은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미국인에게는 모멸감을 불러 일으키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서가운데 자신들이 자라난 기독교적 배경과 그 배경을 구성했던 이야기들이 거짓임을 밝혀준다면 말그대로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경험이 중시되고 내 안에 있는 별을 좇아 살고 악한 세상을 뒤로 하고 신성에 참여한다. 얼마나 멋진가!
그들의 논리의 끝은 잠깐만 생각해도 살 가치를 찾지 못해 결국 세상을 등지는 죽음 밖에는 없다.
그게 자유니까.
웃지 못할 이런 일이 지금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의 잘못이 크다. 개별적 그리스도인의 잘못이 크다.
영지주의적 해석이 필요할 만큼 기독교가 박해 받던 시절은 이제 옛일이다. 제국의 관심과는 다른 주인을 섬기는 기독교는 새하늘과 새땅이 펼쳐지기까지는 박해 받을 수 밖에 없는 실존의 자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오히려 제국에 편승해서 그게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판단하지 않고 그게 이익이 있는지 이익이 없는지만 판단하고 있으니 유다복음서가 사랑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박해도 없다.
다만 안티기독교인들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싸우는 영지주의적 전사들만 가득하다.
세상 더러워서 죽어서 천국가야 편하다는 영지주의나 지금 우리나 다른 것이 무엇인가!
목숨걸고 초기 교부들이 지켰던 신앙이 죽어서 편안한 천국생활의 동경이었다면 영지주의의 주장을 뭐하러 반박했겠는가! 기독교는 지금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 종교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하나님은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 나라가 그립다.
제목으로 봐서도 알겠지만 영지주의 문서인 유다복음서의 발견으로 빚어진 한바탕 소동에 대한 비판서다. 전체적인 깊이에 있어서는 가볍다는 인상을 받았고 이미 대학원에서 Robinson교수의 글을 본 적이 있는 터라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꼼꼼하게 읽으며 라이트만의 표현을 찾아보고도 싶었지만 집중해서 책을 읽고 시간을 보낼 만한 상황이 아니므로 패스!
유다는 정경에서 예수를 판자로 그려진다. 요한은 사탄이 그 마음에 들어가서 그런 무지한 짓을 했다고도 하고 마태, 누가는 잔인하게 목매달아 떨어져 창자가 배밖으로 터져 나와 죽었다고도 전한다. 유다의 배반에 대한 추호의 의심도 없는 전통이 2000여년을 지속해 왔는데 그걸 뒤집는 2세기 문서가 나왔으니 안티팬들에게는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반가울 수만은 없는 것이 이 문서의 저작연대는 2세기이며 그 내용과 구성에 있어서 영지주의 문서로 분류된다. 영지주의라면 유대교적 하나님을 열등한 신으로 무시하고 창조세계는 악하여 이 세계를 탈출하여 자기 안에 있는 신성과 본래적 신성과 합일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앙 체계 혹은 철학 체계라 할 수 있다. 극단적 이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이들의 이해가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이단시 되었던 것은 여러 역사적 문서가 지지한다. 2세기에 기록되었다고는 하지만 유다에 관한 영지주의적 해석, 즉 예수는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신성과 합일을 위한 진정한 지혜(Gnosis)의 계시자였고 세상에서 탈출을 위해 협조한 유다는 진정한 제자였다는 주장은 이미 그 이전 문서부터 간접적으로 반박되어왔다(이레네우스, 이그나티우스).
2000년이 지난 지금 일부 학자(북미학자)들이 유다복음에 목을 메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은 북미의 상업지상주의를 꼽아야 한다. 처음 유다복음서를 Lost Gospel이라는 제하로 출판한 곳은 자연 다큐멘터리로 명성이 있는 National Geographic사이다. 음모이론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유다복음서는 베스트셀러감이다. 얼마나 멋진 구성이 되겠는가? 유다복음서가 정경화에 밀린 이유는 당시 교부들의 파워게임이 있었고 유다복음서는 그들의 권력을 구성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논리다. 그러나 역사는 파워게임이건 뭐건(십분 양보해서) 정경의 복음서를 읽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많은 순교자들을 알고 있다. 유대적 하나님과 역사인식,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지키며 세상가운데서 시저가 아닌 다른 주를 모시다가 스러져 간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다.
시점이 절묘한 것이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인 핍박을 받는 시점에서 영지주의 문서들이 창궐하였다는 거다. 영지주의 문서는 제국에 어떠한 도전도 하지 않는다. 왜 안그렇겠는가? 세상은 악하니 내 관심이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신성만 발견해서 죽으면 그만인 것을...
라이트는 영지주의의 근본을 파헤치는 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북미신학에서 유다복음서가 관심받는 이유를 미국의 사회분석을 통해 드러낸다. 보수 우익 기독교가 미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권세는 누구나 아는 사실이며 일반적인 정서는 그 권위를 거부하고 있고 지난 2세기동안 미국의 기독교의 경직성은 포스트모던 사회를 살고 있는 대부분의 미국인에게는 모멸감을 불러 일으키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서가운데 자신들이 자라난 기독교적 배경과 그 배경을 구성했던 이야기들이 거짓임을 밝혀준다면 말그대로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경험이 중시되고 내 안에 있는 별을 좇아 살고 악한 세상을 뒤로 하고 신성에 참여한다. 얼마나 멋진가!
그들의 논리의 끝은 잠깐만 생각해도 살 가치를 찾지 못해 결국 세상을 등지는 죽음 밖에는 없다.
그게 자유니까.
웃지 못할 이런 일이 지금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의 잘못이 크다. 개별적 그리스도인의 잘못이 크다.
영지주의적 해석이 필요할 만큼 기독교가 박해 받던 시절은 이제 옛일이다. 제국의 관심과는 다른 주인을 섬기는 기독교는 새하늘과 새땅이 펼쳐지기까지는 박해 받을 수 밖에 없는 실존의 자리가 있다.
그러나 지금의 기독교는 어떠한가? 오히려 제국에 편승해서 그게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판단하지 않고 그게 이익이 있는지 이익이 없는지만 판단하고 있으니 유다복음서가 사랑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박해도 없다.
다만 안티기독교인들을 사탄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싸우는 영지주의적 전사들만 가득하다.
세상 더러워서 죽어서 천국가야 편하다는 영지주의나 지금 우리나 다른 것이 무엇인가!
목숨걸고 초기 교부들이 지켰던 신앙이 죽어서 편안한 천국생활의 동경이었다면 영지주의의 주장을 뭐하러 반박했겠는가! 기독교는 지금 여기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는 종교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고 하나님은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
하나님 나라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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