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지 자극적이고 금기의 책인 듯 하면서 매력이 있는 책제목이 있을까?
"보살"과 "예수"는 상식적으로 대적 관계가 아닌가 말이다.


저자는 아는 사람은 알 만한 한국 종교학계의 석학이다.
철모르고 대학 다니던 시절, 은사셨던 분이고 무지몽매한 순수 신앙에 이성으로 딴지를 걸어주셔서 혼란스러운 4년을 보내게 해 주신 분이다.-_-;;


아무튼, 이 분의 주장이 어떠하든지 간에 졸업을 하고 몇년이 지난 지금,
은사의 신간을 읽는 재미가 솔솔했다...
그 시절 수업시간에 들려주시던 말씀들도 새롭게 되살아나고...


그러나 이런 낭만적인 향수와는 다르게
본서의 내용은 그다지 녹녹하게 소설처럼, 혹은 신앙서적처럼 지적(知的) 무장해제를 하고 읽어갈 수 있는 성격은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배경의 가정에서 자라나
불교 연구에 반평생을 바치고 계신 저자의 독특한 자리가 자리거니와
연구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교와 대화를 모색하고 접촉점을 제시하는 다소 위험천만한 주장을 담아내고 있어
본 서는 "다원주의"는 악마적이고 무찔러 와해시켜야할 이 시대의 적이라고 생각할 사람들에게는
중세의 단두대에 올려도 죄책감이 없을 무용을 이야기하고
불교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감히 말하고 있다.


특별히 왜 불교인가?라고 물을 때
저자는 한국적 상황만 고려하여 그리스도교와 쌍벽을 이루는 교세의 종교라서가 아니라
이미 Christendom이라 불리던 세계가 스러진 그리스도교의 대안적 영성의 보고로 불교를 주목하고 수용하는 추세를 고려하여
무시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으로서 불교와의 대화를 시도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다시 자극적인 제목의 보살예수로 돌아가서
왜 그러면 보살 예수인가?
예수는 육화된 하나님이셨다.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보고 있다 못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구원자...
그래서 유대교적 배경을 가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게 "그리스도"라는 메시아 칭호를 부여한다.
만약 예수가 유대적 배경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한국, 혹은 중국이나 일본에 태어나셨다면 어떤 칭호를 얻게 되셨을까?
보살이라는 칭호가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구원을 참자아의 실현이라는 보는데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동전의 양면이며
상보할 수 있는 종교실체라는 건데
다만 참자아를 실현하는 방법에 있어 그리스도교는 보다더 손에 만져지는 방법을 개발했고
불교는 실체보다는 이 실체가 허상임을 발견하는 무념적 방법으로 참자아의 진상을 직관하는 법을 발전시켰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교는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에 집착하여 있음을 가능케 하는 분으로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불교는 있음은 허상일 뿐 있음은 다만 연기에 의해 얽히고 섥힌 임시적 존재이며 존재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공(空)의 세계이며 불교가 지향하는 바다.
그리스도교가 수직적인 존재근원에 주목한다면
불교는 수평적 존재 양태에 주목한다.
둘이 다른 것 같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다원주의적 해석을 하고 싶은 거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극복되는 역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 예로 저자는 12세기의 그리스도교 영성가인 에크하르트를 들고 있다.
에크하르트는 한마디로 불교적 그리스도교를 주장한 교회사의 뭍힌 보배같은 사람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사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수긍이 간다.




이러저러한 할말이 참으로 많은 책이다.
읽으면서는 '이건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내심 최면을 걸면서 읽기는 하지만
마지막장을 덮을 즈음에는 잠자리가 뒤숭숭해진다.
다만, 해답은 허상인 이 세계에 대한 집착, 나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되는 일체의 집착을 끊는데서 해탈과 구원이 시작한다고 하니
이 책을 읽고 망령처럼 생겨나는 생각들에 대한 집착을 단호하게 끊는 것이 이 책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생각많은 신학생들은 한번 읽어봐도 정신건강에 그다지 해로울 것 같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