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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원조교제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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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말인가?
이런 도덕도 모르고 윤리가 땅에 떨어진 세상이 있나!!
본드를 해도 괜찮고 원조교제를 해도 되는 세상이 있단 말인가!
이런 책이 있는지도 모르다가 큰바위가 목사님이 주셨다면서 자랑하길래 살짝 제목만 넣어두었는데
비오는 5월 5일, 대형서점의 메카인 종로에서 삼파전을 위해 둥지를 튼,
강남에서 잘나가던 "반디앤 루니스"에
비피하러 들어갔다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게 집어 들고
20%할인으로 책을 사는게 습관이 되어 주머니는 열지 못하고
죽치고 앉아 읽어버렸다.
미즈타니 오사무는 선생님이다.
전도유망한 고등학교 선생에서 자발적으로 야간고등학교 선생으로의 전근,
그 때로부터 밤거리를 나가 소위 "날나리"들을 만나면서
이들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진정한 교육자...
이 책의 광고는 선생님이 조직폭력배로부터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
손가락이 잘린 사건을 간판에 내 걸지만
자극적인 그런 일화보다도
12년이 넘도록 이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던 교육자로서의 철학이 이 책의 무게를 결정지었다.
누구나 거쳐온 "질풍노도의 시기"를
우린 다 컸다고 얼마나 무시하고 이들의 고민과 문제를 경시하고 있는가 말이다.
몬테소리는 눈높이 교육을 위해 유치원의 선생님 의자를 어린이들이 앉는 높이의
의자로 대치했다고 교육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눈높이 교육은 물리적인 눈 높이를 맞추는 데 있지 않다.
정서적, 감정적인 눈높이를 맞추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작금의 교육자들이 대다수 실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교육당국자는 말할 것도 없다.
"저주받은 89년생"...이런 말이 난무하는 것이 우리 나라 교육현장이다.
공동체성의 함양이라는 그럴듯한 이념은 교사용 지침서에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박아두고
아이들 입에서는 "배틀로얄"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이 끊이지 않는다.
여선생을 사랑하는 남제자를 그린 드라마 때문에 선생님들의 심기가 불편하단다.
극중의 자신들의 이미지가 실추된다나?
그럴 듯 하다.
드라마로 심기가 불편해지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심기는 왜 그리 건드리는지, 대단 스러운 것은 물리적 폭력없이 아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지...
대.단.하.다.
내가 씹는 선생이라는 존재는 물론 돈벌이로 교육현장에서 근근히 기생하는 사람들이다.
미즈타니는 그렇게 사회적 음지에서 신음하며 스러지는 학생을 일으키는 작업이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이기적 행동의 일환임을
겸손하게 고백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발상에서라도 무엇인가 학생들을 위한 대안들이 마련되면 좋겠다.
두서없는 이런 흥분섞인 말이 무슨 힘이 되겠는가마는
교육의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information이 전에 in formation을 위해 헌신함이 있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사랑만이 교육을 구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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