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된 꿈"
말이 좋아 좌절된 꿈이지 원제인 "shattered dream"을 그대로 옮겨보면 "완전히 박살난 꿈"이다.
그러면 이 책은 사람들이 어떻게 완전히 박살난 꿈을 꾸는가에 대한 책인가?
물론 아니다.
이책은 고통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성서 룻기의 나오미의 삶을 조명함으로서 이끌어낸다.
나오미가 승승장구하며
유능한 남편과 두 아들을 데리고
유대땅에서 모압땅으로 소위 "이민"을 갔지만
10여년의 세월 후에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었으며
남은 것이라곤 두 아들이 남기고 떠난 며느리들만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이국의 땅에 살 이유가 없다.
유대로의 귀국을 결정하며 그녀가 가졌을 절망에 관하여 래리크랩은 관심을 갖는다.
그 절망이 그녀의 삶에서 어떻게 승화되었는지를 풀어내 엮은 책이 본 서다.
사실 C.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다루면서
고통은 여관을 자기 집으로 착각하며 잠시적인 평안에 안주하는 천성으로 가는 순례자에게
그곳이 본향이 아님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메가폰"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이면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래리크랩은 상담가요 심리학자 답게
고통의 심원한 것까지 끄집어 내려고 시도는 하고 있는데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는 꿈이 깨어지는 자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친밀한 만남을 위해 준비하신 자리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개가 끄덕인다.
그가 책 서두에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비판하고 나선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금욕주의적 자기 훈련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거다.
그는 이러한 수도원적 금욕주의를 불교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
여기까지 이 악물고 참아보고
끝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들어보기로 한다.
그러나 좌절된 꿈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라는 사실을 강조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우리는 늘 좌절해야 하고
그 좌절을 감사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아울러 이 땅에서의 행복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은 구질구질해야 한다는 인상을 짙게 드리운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신다는 명제는
우리 편에서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거다.
이분이 이렇게 믿고 있다면 할말이 없다.
결국은 신학의 입장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은 바른 일이지만
십자가 넘어의 부활도 우리에겐 약속으로 주어져 있다.
이생의 삶은 불완전한 것은 사실이지만 "악"한 것이 아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두 발은 "이 땅"에 서 있다.
과연 하나님이 두발을 디딘 "이 땅"에서
우리가 지지리 궁상으로 살아가길 바라실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좌절된 꿈이 주는 분명한 유익은 저자의 말처럼
하나님을 친밀함가운데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껄
페이지를 너무 늘렸다.
그러다 보니 불필요한 자기주장을 너무 늘어놨다는 느낌이 든다.
"일관성의 법칙"
사람들은 자기가 주장한 것을 "틀리다"라는 말을 들어도
끝까지 우기는 심리적 논리 집착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
이거 같기도 하고...^^;;
물론 중간중간에 보이는 저자 특유의 깊은 사유는 배울만 하다.
또한 그의 이야기는 탁상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상담을 통해 이루어진 실제적인 이야기라서
더욱 공감가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오바다~
'밑줄 긋는 남자 > 읽어 버린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이라는 이름의 중독-토머스 화이트맨, 랜디 피터슨(사랑플러스, 2004) (0) | 2006.07.05 |
---|---|
두부-박완서(창작과 비평사, 2002) (1) | 2006.07.05 |
단순한 기도-존 달림플(은성, 1999) (0) | 2006.07.05 |
천하무적 홍대리1-홍윤표(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 1999) (0) | 2006.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