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후에 두번 읽은 책으로는 유일무이할 듯 한 책이다.

2002년 겨울로 기억하는 데 그 때 왜 이 책을 구입했는지는 기억이 없다.
적어도 "존 스토트(John Stott)"의 이름 값이 주는 은근한 신뢰가 구입의 동기였을 법 하다는 추측만 할 뿐.

다시 한번 잡은 이유란...
밀릴대로 밀려 정상적인 마감기한도 넘겨버린 서평 레포트를 위한 적절한 볼륨의 책을 찾다가 다시 잡았다.^^;;

본서는 우리에게는 "순복음적"이라는 수식어로 알려진 "오순절주의(Pentecostal)"의 성령 이해에 대한 복음주의 신학적 진술이다. 그래서 더욱 경험적인 요소가 배제되고 성경에 근거한 이론적인 프레임을 제공한다.

다시말하면, 장로교 스타일이다.

알사람은 모두 알지만 스토트는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의 사제다. 개혁교회라고 하기엔 카톨릭적이고 카톨릭적이라 하기엔 개혁교회적인 어중간한 신학적, 예전적 위치의 교회인데, 청교도가 그랬듯 신학적으로는 개혁교회보다도 보수적인 면이 없잖아 있다.

그런 보수주의적 신학이 복음주의적인 한국교회에 호응을 받는 것은 일면 당연스럽다.

초자연적이고 신비주의 지향적인 오순절주의의 성령이해를 수정하여 성령께서는 초자연적인 방법보다는 자연적인 방법, 인식가능한 방법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도덕적 차원에서 성령의 열매가 더 강조된다.
이 열매가 성령의 역사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수긍이 간다.

죄사함과 동시에 받은 유일회적인 성령세례와 지속적인 도덕적 삶을 살기위해 채워져야 하는 성령충만의 경험, 그 곳으로부터 맺기 시작하는 열매.

성경에 근거한 스토트의 진술은 성서언어의 분석도 눈여겨 볼만하고 깔끔한 맛이 있다.

그러나,
전 세계 교회에서 목도되는 오순절주의적 성령의 사역을 단순히 도덕주의적 삶에 국한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분석이 아닐까 한다.
초자연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역사는 분명 일어나고 있다.
부정할 수 없다.
경험적으로 추론하는 성령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성령에 대한 이해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성경 안에 추상어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서술된 초자연적 사건들을 단순히 성경의 역사적 조건안에 한정시키는 것은 구태의연한 화석 신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학은 지금의 컨텍스트를 담아내는 기독교적 언어로 만든 그릇이어야 한다.
성령의 자유케 하는 사역.
인격을 빚어가시는 맛을 아는 것.
이것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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