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갈6:14)
본 서는 겉멋 한창 들어 인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을 때,
나름대로 그 땅에서 어떤 식으로 십자가를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선교적 질문을 가지고 베낭에 지고 함께 했던 책이다.
물론, 겉 멋은 겉멋으로 끊나기 마련인지라 반 정도 읽고 여행내내 그저 버리기엔 아까운 무언가로 베낭 속에 있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겉 멋으로 꽂아둔 책들(?) 가운데 비교적 많은 분량이라서 학기 적응하기에도 알맞고 강단에서 어느 때 부터 듣기 어려워진 주제이기에 스스로도 알쏭달쏭한 점이 없잖아 있어 잡아 들었다.
존 스토트는 학자임에도 현장에서의 왕성한 목회활동으로 사변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삶을 위한 학문을 하는 이 시대의 학자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모든 주제에 대하여 깔끔하게 진열된 백화점의 물건과 같은 인상을 갖는다. 대단히 분석적이되 그 논거가 충분하며 논지 전개가 깔끔하다는 거다.
이 방대한 책도 "십자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예외없이 그의 논지를 편다.
그는 먼저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물으며,
그것을 아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현실적 요청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인간의 패역함 때문에 빚어진 하나님 안에서의 공의, 사랑의 충돌은 결국 하나님 스스로를 유기함으로써 공의를 세움과 동시에 인류를 향한 사랑을 만족시키신다.
이것은 아벨라르가 이야기한 것처럼 십자가가 단순히 예수의 자기희생이 주는 감화력의 상징 이상이 그 사건안에 은닉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주관적인 동의를 요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현실이다.
이 객관적 현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삶가운데서 우리를 옥죄어 오는 악이 정복되는 것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같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기여한 바가 있다면 윌리엄 템플의 이야기대로 "구원을 받아야 할 바 우리의 죄" 뿐이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기분 나빠하도록 훈련되어지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이루어 낼 수 있으며 청산할 것이 있으면 스스로가 뭐든 해서 청산을 하겠노라고 당찬 외침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래서 더욱 십자가의 의미가 교회 강단에서 마저 퇴색하고 있는지 모른다. 기분 나빠하는 성도들이 많아지면 여러모로 곤란할 것이므로....
중세 인문학자로 알려진 에라스무스도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십자가가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명심해야 한다. 항상 헤롯이나 아나니아, 가야바,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고 썼다.
복음을 전하는 곳엔 반드시 십자가의 신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사역자로 서는 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로 구원함을 얻고 자유함을 얻은 모든자들의 몫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자.
신실하게 되는 길과 인기있게 되는 길은 양립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알자.
매일의 삶 가운데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신실함이 새로워지도록 기도하자.
덧말,
우리가 겪는 고난을 조명한 부분, 혹은 대 사회적 메세지도출 부분은 다소 맥빠지는 사변으로 흘러버린다. 1974년 로잔대회에서도 적잖이 대 사회적 메세지에 있어 논쟁이 있던 것으로 아는데, 복음주의 신학의 열정만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몸짓에 대한 더욱 철저한 고민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본 서는 겉멋 한창 들어 인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을 때,
나름대로 그 땅에서 어떤 식으로 십자가를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선교적 질문을 가지고 베낭에 지고 함께 했던 책이다.
물론, 겉 멋은 겉멋으로 끊나기 마련인지라 반 정도 읽고 여행내내 그저 버리기엔 아까운 무언가로 베낭 속에 있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겉 멋으로 꽂아둔 책들(?) 가운데 비교적 많은 분량이라서 학기 적응하기에도 알맞고 강단에서 어느 때 부터 듣기 어려워진 주제이기에 스스로도 알쏭달쏭한 점이 없잖아 있어 잡아 들었다.
존 스토트는 학자임에도 현장에서의 왕성한 목회활동으로 사변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삶을 위한 학문을 하는 이 시대의 학자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모든 주제에 대하여 깔끔하게 진열된 백화점의 물건과 같은 인상을 갖는다. 대단히 분석적이되 그 논거가 충분하며 논지 전개가 깔끔하다는 거다.
이 방대한 책도 "십자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예외없이 그의 논지를 편다.
그는 먼저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무엇을 얻게 되었는지 물으며,
그것을 아는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현실적 요청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창조된 인간의 패역함 때문에 빚어진 하나님 안에서의 공의, 사랑의 충돌은 결국 하나님 스스로를 유기함으로써 공의를 세움과 동시에 인류를 향한 사랑을 만족시키신다.
이것은 아벨라르가 이야기한 것처럼 십자가가 단순히 예수의 자기희생이 주는 감화력의 상징 이상이 그 사건안에 은닉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주관적인 동의를 요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현실이다.
이 객관적 현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삶가운데서 우리를 옥죄어 오는 악이 정복되는 것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같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기여한 바가 있다면 윌리엄 템플의 이야기대로 "구원을 받아야 할 바 우리의 죄" 뿐이다.
우리는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기분 나빠하도록 훈련되어지고 있다. 우리 인간은 우리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이루어 낼 수 있으며 청산할 것이 있으면 스스로가 뭐든 해서 청산을 하겠노라고 당찬 외침들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그래서 더욱 십자가의 의미가 교회 강단에서 마저 퇴색하고 있는지 모른다. 기분 나빠하는 성도들이 많아지면 여러모로 곤란할 것이므로....
중세 인문학자로 알려진 에라스무스도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십자가가 끊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명심해야 한다. 항상 헤롯이나 아나니아, 가야바,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고 썼다.
복음을 전하는 곳엔 반드시 십자가의 신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사역자로 서는 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로 구원함을 얻고 자유함을 얻은 모든자들의 몫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하자.
신실하게 되는 길과 인기있게 되는 길은 양립할 수 없는 그 무엇임을 알자.
매일의 삶 가운데서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신실함이 새로워지도록 기도하자.
덧말,
우리가 겪는 고난을 조명한 부분, 혹은 대 사회적 메세지도출 부분은 다소 맥빠지는 사변으로 흘러버린다. 1974년 로잔대회에서도 적잖이 대 사회적 메세지에 있어 논쟁이 있던 것으로 아는데, 복음주의 신학의 열정만큼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몸짓에 대한 더욱 철저한 고민들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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