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입해서 폼 나게 책꽂이에 꽂아둔 게 벌써 1년여 시간이 흐른 책...
읽겠다고 읽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400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방학도 했으니, 지하철 탈 일도 많으니 잡아 버리고야 말았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어떤 길일까?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 이 책의 내용임은 그야말로 명약관화하겠고...
그럼 이 책의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 "인간성장"을 위한 여정이라 하겠는데
인간성장을 위해 혹은 자아의 확대를 위해 필요한 것이 훈련이라는 거다.
훈련에 따르는 고통과 두려움을 직면할 때마다 우리는 그 만큼씩의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다면, 고통과 두려움을 알면서 직면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펙 교수는 단호하게 "사랑"이라 한다.
그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사랑이라는 단어를
의존감정에서, 사랑에 빠진다는 느낌에서, 희생이라는 오해에서 건져
정신적 성장이라는 새로운 땅에 내려놓았다.


정신적 성장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랑은 이미 필요없는 고통을 안고 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의 진료경험을 통해 말하고 있다.


'정신적 성장'만을 놓고 보면
우리는 쉽게 종교 언어로 둔갑시켜 "영적 성장"을 떠올리게 되는데
펙 교수는 이를 정확히 인식하고 둘 사이의 구분은 없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종교의 기능이랄까?
종교의 목적을 자아와 하나님의 합일이라는 신비주의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물론 합일이라는 상태가 자아의 의식이 없이 하나님의 존재안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니며
나의 의식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 이것이 정신 성장의 종국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신성장이란 "의식"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의식의 성장은 "무의식"과의 조우를 통해 무의식의 지도를 통해 가능해진다는 융의 해석에 동의하고 있다.
더욱 급진적인 것은 이 무의식이 하나님이라는 명제도 서슴치 않고 있다는 거다.


여기까지 글을 읽으면 이 글이 종교적인 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거다.
여기서 종교적이라는 말은 물론 과학적이라는 말의 반대개념이다.
펙의 질문은 또한 여기에 있다.
과연 종교적이라는 말과 과학적이라는 말이 대립개념인가?하는 문제를 짚는다.
물론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그의 이론은 혹은 그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우리의 정신 성장의 여정은
과학적인 것이며 동시에 종교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이지 못한 미신적이라는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큰 주제로 다룬 것은
그의 이야기의 핵심이라할 "정신적 성장"을 왜 이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사랑이 성장을 이루는 힘이라면 이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서이다.
바로 하나님을 말하고 싶었던 거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시작이며 우리가 마쳐야할 종국이라는 의미에서 "알파와 오메가"이시라고...


그럴 듯 하다.
그럼 사랑만 하면 정신 성장을 이루는 걸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소수의 사람만 걸출한 정신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인가?
바로 악의 요구가 여기에 있다.
그는 악이란 다름 아닌 성장을 위한 두려움을 회피하고 의존하길 즐겨하고 안주하려는 우리의 성향에서 찾는다.
다름아닌 "게으름"이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으로 안주하려 드는 것은 이 게으름에서 기원한다고 단언한다.


과연 그렇다.
정신 성장을 하나님과의 합일까지 끌고 간 것은 개인적으로는 다소 극단적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게으름"을 엔트로피의 힘으로 지적한 것은 탁월한 면이 있다.
우리가 성장을 원하지만 하지 않는 것은 바로 두려움 없이 살아가려는 "게으름"에서 비롯된다.
성장을 향한 열려진 은총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는 우리의 의지에 달려있다.
의식의 성장과 함께 부과되는 책임감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의식의 성장과 함께 얻게 되는 영적 권위에 희열을 누려라!!
아직도 가야할 길은 바로 무의식의 세계로 뻗은 길이며 우리가 만나야할 의식으로서 하나님이며 무한의 자유와 책임이 조화를 이룬 정상을 향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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