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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과의 인연은 다소 쌩뚱맞은 데가 있다.
바야흐로 때는 2007년 8월의 마지막 주. 과분한 가족 여행으로 제주도를 4박 5일 쏘다니다가 몸 실은 비행기의 옆 좌석에 앉은 묘령의 지적으로 보이는 여인이 잡고 있는 책을 흘깃흘깃 훔쳐보다가 제목의 도발성으로 인해 외워놓았더랬다. 그러다가 4개월이 지난 지금, 무의식 속에 파뭍혀 있다가 의식으로 올라온 이책을 잡아 들었다.

지나서 얘기지만 지적으로 보이는 그 여인은 다름 아니라 KBS 아나운서였던 황현정씨였다. 싸인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아들 찬빈이가 있어 아빠로서의 체통도 지켜야 겠기에 황현정씨에게 안겨 유쾌한 비행시간을 보낸 찬빈이를 쬐끔 부러워하면서...OTZ

이 책의 후기를 쓰면서 이렇게 분위기 파악 못하는 글로 서두를 연 것은 그 책이 가지는 파괴성무자비성때문이기도 하다. 일종의 해학의 미학이랄까?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를 난 몰랐는데 엄청 유명한 작가이며 옥스포드 교수란다.
친구들에게 이 책을 소개하면서 난 "무신론의 전도자"라는 별칭으로 소개했다.

앞에서 이 책의 성격을 파괴적이고 무자비적이라고 했다.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파괴적이라는 말, 혹은 전투적이라는 말에 대해 도킨스는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누려온 특권적 지위 때문에 별로 전투적이지 않더라도 전투적으로 보인다고 주장하더라만 내게는 그걸 감안해도 전투적이다.
싸움을 건다고 보는 편이 낫겠다.

도킨스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없음'을 논증한다. 그는 글에서 피토하며 신의 부재를 논증하려는 자신의 시도가 종교라는 환각 증세 아래서 신음하는 대다수의 인류를 해방(?)시키고자 함이라고 침튀기지만 그 말은 마치 메아리없이 허공을 울리며 흩어지는 소리처럼 힘이 없다. 인류에 대한 일말의 애정이라곤 적어도 내게는 느껴지질 않는다. 차라리 나의 철저한 논증을 깨보라는 도전적이고 도발적 뉘앙스가 느껴질 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도킨스의 치밀함과 철저함에는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사상, 어떤 종교의 신학자라 한들 이렇게 자신의 신앙의 토대를 위해 변증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만치 그의 논증, 논거는 철저하다 못해 지치게 하는 면도 없잖아 있다.
그리고 고백할 것은 이미 신학적 언어로 고착화 된 내 대뇌구조 안에서 소화할 수 없는 과학 언어가 이다지 많다는 사실에 사뭇 놀라면서 이 책의 70%는 소화했을까 하는 자괴감도 인다.

이런 정황 속에서 비평아닌 비평을 해야하니 두려움도 있지만 비평이란 것이 결국 책 읽은 독자의 몫이니 내 맘대로 지껄이면 그만이지 않은가!

이제 이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가급적 삼가고 읽으면서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어 몇자 적어놓은 메모를 옮겨 보자.

그는 본서의 목적을 신이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인류에게 신이 없음을 보란듯이 증명해서 자유하게 하자는 거다.
그럼, 논의는 당연히 신이 없음을 위한 증명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도킨스의 증명이란 것이 결국은 이미 진부해질 대로 진부해진 신학계의 신논증에 대한 반론으로 시작한다. 그 이후에 뭐라도 나올까? 기대는 기대일 뿐이다. 신논증의 허술한 논리를 깨면 신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생각한 것일까? 만일 그렇다고 치면 신이 있다는 세계의 모든 논증에 반론을 해야 그가 좋아하는 확률적으로 승산이 있다.

그리고 반증을 함에 있어 이미 아퀴나스 시절에 제기한 신논증을 현대 과학적 잣대로 반증을 하다니 언어가 사용된 시간적 범주 자체를 무시하는 공시적 접근이다.

아울러 종교의 존재론적 차원의 논의나 논증보다는 경험적 차원의 결과물로 전체를 평가해 버리는 호전성을 보인다. 그가 사실 학자라고 하면 그가 선택한 실례의 극단성을 비판적으로 거론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학자적 객관성을 가지고 이 책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종교 VS 무신론의 구도에 사로잡혀 링에 오른 파이터의 모습으로 밖에 비치지 않는다. 나의 이런 비판에 그가 할 법한 이야기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신이 사라지는 공백을 어찌 메울지 몰라 그 신의 가랑이를 더욱 움켜쥐는 형국'쯤 일 것이다. 아무렴, 어떠랴?

실례의 극단성은 성서관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성서에 나타난 야훼의 변덕스러움, 호전성, 무자비성을 극대화하고 66권의 나머지는 함께 쓰레기 취급을 한다. 결국 66권을 읽고 소위 '변화' '회심'한 사람은 말 그대로 한심한 유아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다.

최고의 혐오는 바로 그 자신을 근본주의자와 비교하는 것을 거부하며 자신은 열정적이고 근본주의자들은 교조적이라는 도식을 만들고 자신은 자신의 입장이 새로운 증거앞에 변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겸손을 갖췄기에 근본주의자들과는 다르다고 한다. 이게 소위 도킨스빠들한테는 역시 도킨스님이셔 할지 모르지만, 가변성을 인정하는 미덕을 갖춘 도킨스가 피튀기며 이야기하는 논증때문에 종교를 버리고 살던 사람들이 이후에 도킨스 스스로가 변화된 증거 앞에 자신의 입장을 정리했을 때 경험할 당황스러움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고 느껴진다. 이게 인류의 해방을 주창하는 무신론 전도자 도킨스의 인류애인가?

그가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한 이야기는 결국 프로이트나 포이에르바하의 재탕에 또 재탕이며 재방송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까봐 적당히 과학적 언어를 버무린 은근 슬쩍 재방송에 다름 아니다.

그럼,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인가?
그렇지 않다. 개인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이 책은 내가 얼마나 편향된 세계 속에서 살고 있는지를 일깨웠고 우리의 시대가 익숙한 언어에 얼마나 낯설어하는지 알게 해 주었다.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론적 증거들에 대한 좀 더 세심한 관찰과 수용이 있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자로서 도킨스가 보여주는 신학적 섬세함을 역으로 신학도인 내가 과학적 섬세함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

과학적 근거야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니 도킨스의 이야기를 100%수용한다고 하면 이 책은 충분히 파괴적이다. 비평의 끈을 놓고 읽으면 분명 무자비한 도킨스의 칼에 상처나기 십상이다.

최근 안티기독교세력과의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의 발전적인 움직임들이 교계에 일고 있어 고무적이지만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을 한다. 그만큼 도킨스의 철저함이 경이롭다.

이 책과 아울러 읽어줄 도킨스 반론서 '도킨스의 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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