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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시험을 모두 마치고 밀린 책읽기에 재미 들린 요즘, 실망시키지 않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맛보게 한 책이다.

부제가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이고 보니 과연 이 책이 소위 과학적 지식을 가진 자가 썼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낳지만, 스캇펙 박사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정신분석학자이다. 그러니까 이 시대가과 열광하는 과학적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악에 관한 소고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력을 가진 분이기에 그 제목의 매력은 배가 된다.

사람의 기본적 성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짓"(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인간이 완벽한 존재는 아니라는 측면에서 혹은 깨어진 상처들을 안고 사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예외없이 자기방어 기제로 '거짓'을 사용한다는 의미다)은 인정하기 싫은 자신의 불완전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이다. 스캇펙 박사는 자신의 임상경험을 토대로 얼마나 사람들이 '거짓'을 만들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보여주며 그 가운데서 치료에 실패한 사례, 거짓의 벽이 너무나 두터워서 오랜 치료기간에도 불구하고 벽을 무너뜨릴 수 없었던 사례들을 통해 조심스럽게 '악'의 실체를 거론한다.
과학적 접근의 첨단이라할 정신분석학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데 있어 '악'을 운운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주장일까 생각해 보면 거꾸로 스캇펙 박사의 확신이 얼마나 컸겠는가 짐작하고도 남는다.

왜 사람들은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자신의 온전함을 증명하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고 비판 일색의 삶을 살면서 자신을 고립시키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렇게 살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누군가와 거래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에리히 프롬의 연구를 많이 참고하면서 악이 하나의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라고 보며 악은 처음부터 인간 내면에 병적 증세를 잃으키고 거짓을 양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 우리의 거래에 따라 거짓을 키워가고 결국 병적 증세로까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적절한 지적이다.
우리가 마치 천사와 마귀가 싸우다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할 때 마치 나의 책임성은 쏙 빼놓고 마귀에게만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바로 앞서 말한 문제제기 가운데 "나는 정상적이다"라는 주장을 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우리의 삶 아주 구석구석마다 악이 게재할 소지가 많다는 말이다. 거래의 개념은 나의 책임성을 절대 묵인하지 않는다.

여기서 그의 악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면, 악이란 나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데 사용하는 정치적인 힘이다. 얼마나 공감하는 말인지 모른다. 이 정의에 따르면 도무지 악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깨어진 존재로 살아가기에 늘 자기성찰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거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자기성찰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게으름'이라 한 바 있다. 일리가 있지 않은가? 태만 때문에 우리는 자기성찰에 단 1분도 할해하지 않는다!(못하는 것이 아니라 않하는 것이다)

악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그의 사례 뿐 아니라 인접 의사들의 사례를 통해서도 치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무엇인가를 늘 감지하지만 그것을 규정할 수 없어 치료에 손을 놓고 있는 사례가 있다 한다. 스캇펙은 그 부분이 바로 악으로 규명해야 할 부분이며 규명을 해야 치료에 대한 연구가 시작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학계에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두려움이라는 거다. 악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보면 그 반응은 자연스럽다. 악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할 사람이 있는가? 우리의 첫째 반응은 혐오감이다. 가야할 길이 아직 멀다...

개인적으로 관심갖고 읽어나간 부분은 축귀에 대한 언급이다.
그가 소개한 축귀의 경험이 많은 부분 내가 경험한 것과 유사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종교적 범위 내에서의 축귀에 대한 설명 외에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궁금한 터였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축귀 사역의 95%는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가능하다고 한다. 나머지 5%, 그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영역, 신비의 영역이라는 고백한다. 이 고백이 나는 진실하다 믿는다. 축귀 사역에 있어 마치 신비스런 무언가가 있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100% 신비로 치부하는 종교서적이 얼마나 많은가! 개인적으로 계몽주의적 교육을 받아서 그런가 100%라는 말은 못미덥고 100%과학적이라는 말도 못미더운 마당에 5%의 신비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가 말이다.

끝으로 그의 악에 대한 저항은 개인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소위 집단적 악에 관한 고찰까지 아우른다. 사실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대부분의 고통은 개인적인 악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집단적 악에 기인한 바가 크다. 집단적 악이 더 파괴적인 이유는 "책임소재가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집단적 악이 판치는 곳에서 그 악에 누가 책임이 있겠는가? 몇일 전 영어문제 아티클에서 cooperative crime에 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조직에서 개인적 업무는 악하지 않으나 조직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악한데 누가 그 악에 대한 책임이 있는가? 하면서 이런 류의 범죄를 cooperative crime이라 하고 연구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글이다. 그는 이런 형국의 악이 가능한 이유가운데 하나가 현대사회의 전문화를 꼽는다. 전문화되면 될수록 직접적인 책임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 얼마든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는 거다. 전문화가 바보를 만든다는 말도 하더라만 결국 전문화는 도덕불감증을 만들어내는 악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단적인 예를 보여준다.

그의 대안은 단순화다. 효율을 따져 전문화의 당위를 역설하지만 전문화는 인간을 말살시키며 악한 행동을 불러올 수 있는 가능성이 크므로 다소 불편하더라도 단순화를 지향하는 것이 악을 지양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는 거다.

개인이 악에 대해 민감하면 자연스럽게 조직이 악을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조직 역시 유기체적 존재이므로 당연하다고 그는 역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개인이 악에 대해 철저하게 거부할 수 있으려면 조직이 갖고 있는 악의 구조의 와해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직이 악의 구조를 가졌는데 개인이 악을 거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가! 이 과제는 마치 닭과 달걀의 우선성에 관한 문제만큼 논쟁의 여지가 있다.

여하튼, 거짓의 사람들은 가장 드러내기 싫은 인간실존의 냄새나는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내가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서도 가끔은 가식적, 혹은 현학적 글쓰기로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역시 자기 보호를 위한 거짓이라는 생각에 까지 미치니까 글쓰기가 두려워진다. 몇번씩 읽어도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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