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도서관에 오랜만에 가서 사람의 손이라곤 타본 적이 없는 깔끔한 책이기에 잡기도 했고
올 겨울 밟을 땅이라서 이것저것 풍월이라도 있어야 할 듯 해서 잡았다.
역시 공공도서관에서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책장을 넘길 때의 느낌은
길가다가 만원짜리라도 주운 느낌이랄까?^^
공일주교수는 약력을 보니 요르단 대학교에서 현대아랍어를 강의하고 계신다.
그 분이 아랍어권에서 태어나신 것도 아닌 듯 하고
외대아랍어과를 졸업하셨으니 토종이신 듯 한데
요르단에서 아랍어를 쓰는 현지지성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고 계시다니 혀를 두를일이다.
한마디로 대단하신 분임이 분명하다...
이 책을 저술하신 목적이 아브라함의 종교라 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반목과 폭력의 고리를 끊고 화해와 상생을 모색함이라고 하니 목적 또한 반듯한 책이다.
반목의 골의 시작은 어디서 부터인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율법, 혹은 경전의 근본주의적 해석이라고 말한다.
유대교의 율법 준수도 철저한데가 있지만
이슬람 또한 이에 못지 않다.
이슬람은 아랍어 이외의 언어로 꾸란의 번역을 용납하지 않는다.
꾸란에 사용된 고전 아랍어는 계시의 언어로서 다른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거룩한 언어라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유난히 아랍어권 예술에는 아랍어를 형상화한 문양을 많이 보게 된다. 같은이유에서다.
어쨋든 공일주 교수는
유대교의 근본주의적 율법 해석은
시온주의를 배태하고 기독교도와 무슬림은 척결해야 할 대상이 되며
이슬람의 근본주의적 꾸란 해석은
세대론적 종말론을 근거로 이 땅에 알라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낳고
유대인, 기독교도는 타도의 대상이 되며
기독교의 근본주의적 성서 이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현하기 위해
이라크에 미사일을 선물로 쏟아붓게 된다고 말한다.
참으로 웃지 못할 기현상은
어느 문명권보다도 평화를 갈망하는 민족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이 중동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샬롬(히브리어, 평화)"과 "앗 쌀라무 쌀라이쿰(아랍어, 평화를 그대에게)"를 늘 입에 달고 산다.
그러나 늘 국제면의 유혈사태는 중동에서 생겨난다.
만약 이러한 유혈사태가 율법의 근본주의적 해석에서 비롯된다면
어떻게 이들을 계몽해서 늘 갈망하는 "평화"의 맛을 그들에게 느끼게 할 수 있을까?
공일주 교수는 이부분에서는 침묵한다.
93쪽의 지면이 이 논의를 진행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맞다. 분명히 부족하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길게 보자면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약속 받았을 때부터 가나안 땅에서의 폭력은 예견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미 그곳에 정착한 원주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국의 인디언들이 메이플라워호에서 내린 사람들에의해 죽었다는 사실에는 분개하지만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평화를 구가하던 이들이
안면도 없는 허름한 합삐루들에게 죽어간 사실에 분개하지 않는다.
성서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여호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
따지고 보니 이스마엘의 후예라고 알려진 아랍인도 아브라함의 아들인 거다.
그러다보니 이슬람도 내땅을 돌려달라고 기를 쓰고 달려들고
유대인은 이삭의 후예로 정통 자손이라고 그 땅을 내 놓지 못하고
기독교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관대한 해석을 하면서도
유대교에 대한 열등감이 있어서인지 유대교 편을 들어준다.
어느 구석 평화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덴장...
또 순환논리다.
머리 아퍼 그만 하련다.
논리를 넘어선 직관 혹은 초월적 의미에서
"평화가 온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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