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만나는 시련들은 그 경중을 떠나서 아프다. 견딜만할 때는 시련은 우리를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는 경험적 진실들을 긍정하지만, 막상 시련 가운데 있으면, 아는대로 긍정하고 논리적으로 움직이질 않는다. "불 시험" 불같은 시련이 따로 있겠는가? 모든 시련이 불같이 뜨겁다. 뜨거워서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기왕지사 뜨거운 불길 밖에 남은 길이 없으면, 조금 덜 뜨거운 곳을 디뎌 불 밖으로 나아가려 애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가 있으랴. 인생에서 만나는 시련들을 피할 길이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주로 모셔 당해야 하는 시련들이 덤으로 있다. 

예수를 믿어 "복"받아야 한다는 사람들을 본다. 예수도 피하지 못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고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면 "십자가"를 피하지 못한다고 복음서는 줄구장장 들려준다. 십자가를 피할 길이 있다고, 시련을 당하지 않는 길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피를 토하며 성토하던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들의 목적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반증이다. 동시에 주의 십자가는 "부활"로 하나님의 보증을 받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복음"이다. 다른 복음에 매여 있는 자들은 십자가를 부인함으로 부활의 생명과는 무관한 인생으로 사는 거다.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겪여야 하는 시련들은 이상히 여길 게 아니다. 도리어 즐거워 할 일이다. 무엇 때문에 즐거워 해야 할까? 나의 시련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화한다는 것은 마땅한 부활의 생명을 얻게 하는 확증이다. 그렇기에 복있는 자다.

모든 시련을 그리스도의 고난을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에덴 이후 타락한 세상의 조건으로 맞는 인간 공통의 시련들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환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시련들은 그리스도의 긍휼의 전제가 되기는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동인이 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게 그리스도의 시련은 아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4:15). 

나의 이기적 욕망으로 빚어진 왜곡 때문에 겪는 시련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누군가를 살인하는 이유, 누군가에게 악행을 하는 이유, 남의 일에 이런저런 참견을 하는 이유의 밑바탕은 자기 욕심이 있다. 내 유익이 있다. 내 유익 없이 살인할 이유없고, 다른 이를 해할 이유도 없다. 내꺼 챙기다가 받는 고난은 긍휼의 대상 조차 안된다. 당장 심판받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기쁘게 여기고, 복으로 여길 수 있는 시련은 어떤 것일까?

베드로는 명토박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는 시련" (14절)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 (16)

그리스도가 이끄시는 대로의 삶, 하나님이 지향하는 곳을 바라보며 살다가 당하는 시련이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있는 성도들이 당하는 시련이다. 

요즘 한국교회는 아우성이다. 감히 "핍박"이란 말로 순교자들의 숭고한 죽음을 더럽힌다. 국가가 교회 말살 정책을 펴고 있다는 황당무계한 논리를 편다. 그 논리에 과연 누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중첩 시켜 보고 있을까? 그 북받친 설움으로 토해내는 이야기를 누가 "그리스도인"으로 당하는 고난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한다고 볼까? 무너진 도덕성과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다가 코로나 19으로 헛발질만 해대다, 상식 가진 이들의 조심스런 잣대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미숙함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룩한 옷을 입혀 속내를 감추지 말고, 그냥 "힘들다"고 하자. 나도 힘들다. 우리도 힘들다. 고루한 모더니즘의 교회를 버리지 못하면, 새술을 담을 새부대는 요원한 일이다. 코로나 19이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중이다. 덮어 놓고 없던 것으로 여기던 치부를 여기저기 헤집으며 드러내고 있다. 코로나 19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교회도 예외일 수 없다는 거다. 거들먹 거리던 신앙의 행태들의 진상을 하나씩 헤집고 있다.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라 여기는 오만의 초라한 속살을 훤히 드러내게 만들었다. 부끄러워 할 일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순교"니 "핍박"이니 하기 전에, "부끄러워 해야 할 일"이라도 먼저 부끄러워 하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나는 작금의 한국교회가 자기성찰도 없는 반응에 반대하면서도,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시민들의 해우소 역할을 하는 게 도리어 감사한 생각마저 든다. 비난이 지나친 면도 없잖아 있는데, 의도하지 않게 교회가 사회에 만연한 불만을 완충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크게 여기고 싶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 
다만, 지금 교회가 당하는 어려움을 "그리스도인으로 받는 고난"이라는 착각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깨어진 세상에 살면서, 누구나 예외없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종교적"으로 포장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하는 시련 가운데 있는 교회들은 "말"이 없다. 억울한 게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의 시련이 뜨겁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바라보시는 곳을 향해 걸으면서 예비된 영광을 더 즐거워 하기 때문이다. 그들 위에 계신 하나님의 영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수치보다 더 큰 기쁨을 길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억울함보다 큰 위로를 얻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창조주께 의탁할지어다"(4:19). 

"선을 행하는 가운데"라는 말이 눈에 띈다. 시련이 와서 흔들릴지언정, 그리스도인이 행하는 선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신실하신 창조주께, 나의 신실함으로 응답하라는 말이다. 고난을 이기는 길 따위는 없다. 고난을 지혜롭게 견디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선을 포기하지 않는 삶, 창조주의 신실함에 응답하는 삶, 고난 중에 이 지혜의 근육을 덧입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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