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바울이 "비밀"(15:51)이라 할만큼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다. 덮어놓고 나중에 천국가는 거라고 믿는 게 속이 편할 때가 있다. 영 틀린말도 아니다. 

이 단절이 고린도 교회의 여러 난맥상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공동체에 일어난 숱한 문제들을 대하면서, 바울은 "복음"을 해명할 기회로 삼는다. 복음의 본질을 다시 일깨울 필요를 느낀다. 복음, 그 가운데 부활의 오해가 신앙생활에 있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본다. 

 

바울은 부활을 "변화"라 한다. "썩어지지 않은 몸"으로의 변화 말이다. 분명 우리가 감지하는 감각세계와는 차별적이라서 는 말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썩어지지 않은 몸이 사람이 본래 가졌던 복이다. 그게 "비밀"이라고 부를 만큼 먼 현실이 된거다. 멀어졌으니, 관심도 없다. 보이는 것을 전부라 여기며 살아간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승리(57)는 그 "썩어지지 않은 몸"에 대한 기억이 가까워 졌다는 것이 아닐까? 나와 무관한 이야기라 여겼던 그 삶이 선뜻 나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은 아닐까?

 

종말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과 부활과는 철저하게 "단절"만을 경험한다. 지금 살아가는 일과 부활은 좀처럼 관계를 찾기 어려워진다. 내가 죽는 순간, 혹은 그 안에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면, 맞을 현실로만 이해한다. 대개는 통속적인 부활 이해가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거다. 

 

바울의 앞선 맥락의 "씨" 유비가 이 통속적인 부활 이해에 어느 정도 활기를 불어 넣는다.  

씨의 유비는 살과 피로 살아가는 삶과 부활의 삶의 형태가 질적으로 달라질 거란 말을 한다. "단절"이 초점이다. "격차"가 있다는 말이다. 죽음을 비웃게 될 것이란다.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두려운 현실을 비웃을 수 있을 만큼, 전혀 다른 삶의 양태가 부활이다. 그러나, 형태가 그토록 격차가 나더라도, "씨"가 심겨야 부활의 몸을 얻는다. 씨와 같은 살과 피의 삶이 불필요한 게 아니라, 살과 피는 "심겨야"하는 거다. 완성된 형태와 씨의 형태는 격차가 있지만, 씨에 담긴 "생명"은 연속성이 있다. 

 

부활을 "입는다"는 동사를 사용해서 표현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 (고전 15:53)

입는 주체는 썩을 몸이다. 썩을 몸과 썩지 않을 몸이 연속성이 있다는 말이다. 나의 지금의 삶이 부활의 몸을 입은 때의 삶과 연속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 연속성이 우리의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한다. 

그러면, 우리가 살과 피를 입고 하는 모든 일들이 부활의 삶과 연속성이 있고, 헛되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고전 15:58a). 

 

단절이 아니라 연속을 경험할 "살과 피"의 삶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방향성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 방향성이란, 주님의 일을 더 많이 하는 삶을 낳는다. "주님의 일"이란 무엇일까? 앞서 "썩어지지 않을 몸"에 대한 기억을 회복하는 일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승리라 했다. 주님은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을 위해 오셨다. "썩지 않을 몸"이 주어졌던 그 태초의 인간다움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여하한 삶의 조건과 상황 속에서, 사람다움을 잊고 살아가는 이들을 치유하고 세워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가는 일을 위해 오셨다. 쾌락의 수단이 되어버린 여인들을 회복시키고, 노동의 도구로 전락한 이들을 회복시키고, 병마에 시달리고 타인의 선입견 아래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살아가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오셨다. 

그 주님의 일을 더 많이 하는 삶이 헛되지 않은 삶이고, 부활의 삶을 사는 거다. 부활을 아는 자로 사는 거다. 

 

주님의 일을 교회 안에 가두고 사는 데 익숙해 졌다. 이건 평신도나 목회자나 피차 다를 게 없다. 요즘, 코로나 사태로 "주님의 일"을 하기 어려워 졌다 (?). 주님은 부활의 삶은 주님의 일을 더욱 열심히 하는 것이 있다고 하시는데, "교회당"이 닫혔으니, 주님의 일을 할 기회가 없어졌다. 우리가 이렇게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일"을 하고 있던 게 아닐지 모른다.주님의 일이 "교회당"에 갇힐 리 만무하다. 그동안 우리의 편의를 위해 "주님의 일"을 "교회당에서의 섬김"으로 치환해 왔구나 하는 짙은 의혹이 든다. 부활의 삶을 위한 주님의 일은 "교회당"에 갇히지 않는다거나 6일의 삶이 예배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는데, 막상 "예배당"을 닫으니, 6일의 삶을 예배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더욱 새겨갈 수 있는 기회인데, 갈팡질팡이다. "말잔치" 뿐이었던 거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온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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