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에 대한 신앙인의 이해는 고린도전서의 바울의 증언에 기대기 일쑤다. 은사의 종합선물세트가 고린도교회에 있었다는 방증이다. 일면 부러운 측면이 있다. 자연적이고 이성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은사들에 대한 설명이 넘쳐나지만, 그 틈을 헤집고 고개를 내미는 "초자연적 은사"들에 마음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일터다. 

 

소시적에, 그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사모하면서, 구하던 때가 있었다. 지금 돌아보아도 참 순수했다. 바울의 경고도 충분히 숙지했기 때문에, 은사를 공동체의 덕을 위해 활용하겠노라고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구했다. 그렇게 자기 검열을 몇겹을 하고 구했어도, 방언을 받으니, 방언 받았다는 다른 이들의 방언이 거슬리기 시작한다. 세련미에 집착했고, 통역에 집착했다. 자기 검열은 자기 검열일 뿐,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의 갈피를 어찌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이야 그 때만큼, 은사를 사모하지는 않지만,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지혜를 구하고 의지하는 마음의 결이야 다를 것이 없다. 

 

12-14장까지 숱하게 은사에 대한 가르침과 교회의 덕을 위해 사용할 것을 강조하는 바울의 목소리를 듣다가, 문득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무겁게 다루어지는 "파당"의 문제, 분열에 문제에 생각이 닿았다. 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은사의 교범으로 삼을 만큼 다양한 은사들이 드러났던 교회가 "파당"의 문제로 휘청이더니, 바울을 대적하고, 나아지는가 싶다가 클레멘트 시대에 소리없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수만가지 은사를 갖고 있음이 아무런 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은사 무용론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거져 주시는 은사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겠으며, 헌신의 자리에 서겠는가? 다만 은사 지상주의는 경계해야 한다는 진실을 고린도교회는 자신의 명멸로 증거하고 있다. 은사도 파당의 근거로 삼을 수 있는 주도면밀함이 우리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하고, 그 주도면밀함에 고삐를 걸어야 은사가 은사로 드러난다. 은사가 제 길을 찾아 흐른다. 

바울은 그 사랑이라는 고삐를 제시했다. 사랑으로 은사에 고삐를 걸어야, 은사는 자기 자신에게로가 아니라, 주어진 본래의 목적에 따라 타인을 향해 흐른다. 

 

수만가지 은사가 있어도, 고삐 풀린 은사들은 "파당"과 자기만족의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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