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 ![]() N.T.라이트 지음, 박문재 옮김/크리스챤다이제스트 |
책을 덮어두고 다른 짓을 하다 다시 읽어도 감동이 반감하지 않는 신비로운 책.
전작만큼 어마어마한 사전적 저술에 감동까지. 감동은 그의 주장에서 비롯되지만 그가 자료를 다루는 방식과 양에도 감동을 받는다.
전작에서 신약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전제들을 검토하고 유대 내러티브 속에서 성서를 읽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으며 이제 그 전제들과 배경을 가지고 복음서가 집중하는 한 인물, 예수에 대해 추적한다. 또 예수냐? 하는 사람이 이상하지 않을만큼 예수 연구는 긴 시간 방대한 양의 연구물이 축적되어 있는데 도대체 그의 연구는 그 연구의 축적물과 무엇이 구별되는가? 그의 입장은 소위 그로 부터 시작한 '제 3의 탐구' 영역으로 특징지워진다.
2000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며 "의미"를 천착한 브레데 이후의 연구에 반기를 들며 슈바이처가 열어놓은 종말론적 세계 속에서 철저하게 유대적인 내러티브 세계 속의 역할을 찾은 그의 결론은 메시아적 소명의식을 지닌 궁극적인 예언자였다는 프로필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그가 메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반복적으로 환기시키는 바는 '신성'의 개념의 부재이다. 메시아는 수퍼맨이 아니라는 말이다. 1세기 유대인들이 그렇게 사용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이해할 때 19세기 계몽주의의 전제들을 가지고 접근해서는 결론없는 사변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 그의 의지는 1세기 유대의 역사 속에서 예수를 보기 시작하면 예수의 메시아적 행위들을 만나게 되고 그 행위들이 어떻게 메시아적인지를 물을 수 있고 그를 통해 재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예수의 선포의 핵심이라할 하나님 나라의 유대적 의미를 묻는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유대적 소망을 어떻게 재정의하고 있는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로마에 민족주의의 발로에서 무력적으로 항거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고 있는 것인지, 새로운 공동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물으며 메시아적 소명을 따랐다는 것이다. 라이트는 기본적으로 예수의 모든 행동과 말씀을 상징 행위로 본다. 왜냐하면 그에 눈에 비친 예수는 예언자이기 때문이다.
구약시대의 많은 예언자와 맥락을 같이 하면서도 예수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메시아적 사명을 감당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주장 앞에 "하나님 아들"이라는 성서적 표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묻고 싶어 진다. 라이트는 칭호의 묵시문학적 배경과 용례들을 자세히 살피며 하나님의 아들이 일차적 의미가 아니라 묵시문학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공동체, 개인에게 주어진 칭호임을 논증한다. 그의 풍성한 묵시문학적 이해와 중간기 문헌에 대한 해박함이 신약성서를 읽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순간 구약의 읽기가 문자적 읽기에 의존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아쉬운 점은 있다.
구약 내러티브의 기본 구조인 포로생활-악인과의 전쟁-포로 귀환-시온에 임하는 하나님을 상징하기 위해서 예수는 부단히 성전에서 심판을 예고하는 행동을 하셨고 자신의 삶이 구속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유월절기에 저녁식사를 함께 한다. 그 밤을 지나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가 구현한 야훼의 의지를 가장 궁극적으로 보여주었고 카이사르의 방법이 아니라 야훼의 방법이 무엇인지를 만천하에 드러내시고 차원이 다른 승리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승리...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야 얻을 수 있는 야훼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최고의 차원을 얻는다.
폭력과 비난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최대의 수동성으로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에 내어 달린 예수는 과연 야훼의 시온 임재를 자신의 어깨에 걸머 지신 하나님의 상징이셨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가 소위 복음서에서 재림 본문으로 읽어본 상당수가 재림본문으로 읽혀서는 안된다는 그의 주장이다. 그는 재림을 나타내는 언어가 묵시문학적 언어이며 사실적 언어가 아니며 철저하게 유대적 세계관 속에서 사용된 언어이기 때문에 유대 세계관 속에서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논리에 바울의 분명한 재림신학을 근거로 딴지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그가 이런 긴장을 이미 간파하고 있고 후속작에 바울신학을 저술할 것이기에 당장 생겨나는 질문들은 묻어두기로 했다.
신약성서가 구약과 중간기 문헌으로 인해 얼마나 풍성하게 읽혀질 수 있는지을 깨닫게 한 것은 이 책의 큰 강점 중에 하나이다. 또한가지 개인적으로는 그의 '역사적' 접근이 예수를 삼위일체의 2위 하나님 도식을 머리 속에 먼저 꾸겨넣은 사람들의 거북함을 상당부분 해소하고 있는 것도 큰 강점이다.
그의 논리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훼손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얻는다.
신학은 분명 전제 없이 설수는 없는 학문영역이다. 물론 모든 학문 영역이 마찬가지일텐데, 이왕 전제해야 할 최소한의 것이 있다면 라이트의 긍정적 전제가 신학함에 있어 더욱 유익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3권은 1000페이지가 넘는 양에 "부활"이라는 주제적 연구만 담았다고 하니 또 한 번 갈등이 생기지만 이 글을 마치고 나서 분명히 나는 3권의 첫장을 열 것이다.
'밑줄 긋는 남자 > 읽어 버린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속고 속이는 세상(『치팅컬처』, 데이비드 캘러헌, 2008) (0) | 2009.01.22 |
---|---|
개념 장착이 필요하다면(남경주,『개념어 사전』, 들녘, 2008) (0) | 2009.01.06 |
가르치는 자가 된다는 것(『가르칠 수 있는 용기』, 파커 파머, 2005) (2) | 2008.10.02 |
새로운 눈을 뜨다(신약성서와 하나님의 백성, 톰라이트) (0) | 2008.09.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