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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가 상상한 그리스도 - ![]() 김호경 지음/살림 |
김호경 교수의 책은 언제 읽어도 정감이 있고 글이 소박한 데 힘이 있다. 국문학에서 무엇을 배우겠는가 했던 젊은 날의 무지를 최근들어 국문학도의 책들을 읽으면서 부러움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글을 쓴다고 한다면,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국문학을 하라고 권하고 싶을 만큼 우리말이 가진 의미를 또 소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책도 김호경 교수의 여느 책과 마찬가지로 참 짧다. 100여 페이지 남짓한데 그 적은 지면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답하고 있으니 적잖이 우려가 되었다. 타이쎈이나 보그만 해도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10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의 책을 쓰지 않았던가! 거기다가 단순히 예수전 이랄지 역사적 예수랄지 평범한 제목이 아닌 "예수가 상상한 그리스도"라는 다소 도발적 제목을 가지고 글을 쓴 걸 보고 용기 있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제목만 보면 이단적으로 보이는 이 책이 읽고 나면 왜 "상상"을 운운하는지를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상상의 주체나 상상의 객체가 예수와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에는 엉성한 데가 있다. 예수는 그리스도를 상상한 적이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 암시하는 바가 아닌가!
제한 된 지면을 통해 김호경 교수가 보여주고자 했던 예수의 면모는 바로 독특한 '권력'의 사용이다. 억압의 도구와 보신의 도구로 사용되는 '권력'의 습성을 예수는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그리스도적 면모를 살피고 있다. 예수는 과연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단적으로 말하면 권력을 자발적으로 포기한다는 데 그 독특성이 있다.
권력을 포기함으로 기존 질서에 혁명적 도전을 가하는 삶이 바로 예수의 삶이다.
예수의 권위 혹은 권력(exousia)은 철저하게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 일방적인 포기와 헌신으로 점철되어 있고 이 포기가 피라미드 권력 구조의 노예로 살아가는 우리를 해방시키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사랑하는 에로스나 신의에 기초한 필리아적 사랑이 아가페와 구별되는 점이 바로 여기이다. 아가페는 상대의 반응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일방성과 진실이 있다. 그러나 고귀한 필리아 사랑이라 하더라도 양자 간의 모종의 합의 혹은 기대에 부응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필리아이다.
예수의 아가페, 즉 사랑의 대상이 무언가를 해줄 수 없다할지라도 자신의 권세를 포기할 수 있는 자발성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가셨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포기임과 동시에 그 자발성으로 기존 질서에 도전한다.
반대급부의 기대없는 권세의 포기, 아가페의 실현을 향한 삶의 작은 실천이 필요한 때다.
내외로 그리스도교 자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히는 이 때에 비판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목회자가 아님에 안도하지 말고 다음 세대의 교회를 건전한 토대 위에 세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예수의 삶은 가진 것을 "내게"가 아니라 "이웃에게" 내어 놓는 삶이었다.
가진 것이 삶을 건 '권세'라 하더라도 그 권세는 하나님 나라에 종속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난 '권세' 얻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세속의 사람인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인다.
상상력은 모든 권세가 이웃을 향해 열려진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그리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의 상상력이 그러했듯 하나님의 가치가 세속의 세계 구석구석을 파고 들어 초대교회의 모습에서 보여지던 하나님 나라의 일면을 우리의 일상 가운데 발견할 수 있도록 상상을 억압함 없이 그 세계를 그리는 적극적인 상상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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