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 10점
톰 라이트 지음, 양혜원 옮김/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원제는 Surprised by Hope 되시겠다. 이 책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그 소망의 실체를 보여주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물론 기독교 학자이니 만큼 그 소망의 실체가 기독교적 세계관 속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하는 소망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적 소망 혹은 희망이라고 한다면 흔히 죽어서 가는 "천국"을 떠올린다. 디즈니 성과 같은 고딕 뾰족탑이 있고 각종 보화가 가득하고 길마져 순금으로 깔려 있는 천국...

이런류의 유토피아를 "천국"으로 묘사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 때문에 막스"종교(기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주장까지 뱉어놓지 않았던가! 어떤 면에서 막스는 유토피아적 천국 묘사 때문에 실제로 잃어버린 기독교 유산을 정확하게 짚었다. 막스의 탄식은 기독교인의 탈세속성, 탈역사성을 비판한 데서 연유한다. 이분법적인 천국과 세상의 분리가 땅을 디디고 살고 있으면서 육체성을 폄하하고 귀신처럼 둥둥 떠다니는 천상의 세계만 동경하게 했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은 역사 변화의 능동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주체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럼 이게 기독교가 말하는 소망의 실체인가?
결국 둥둥떠다니는 귀신이 되는 것이 우리네의 소망이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란 말인가?
"아니올시다"라는 게 라이트의 주장이다.
사실 철저한 이분법적 세계관 속에서 배태된 현실 부정, 육체성 부인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한 조류인 플라톤주의, 더 구체적으로는 중세 신학의 가닥을 제공한 신플라톤주의가 되시겠다.

그렇다면 우리를 놀라게 한 진정한 소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철저하게 역사 속에서 발생한 예수의 부활이다. 또 그 얘기냐? 할 수도 있겠으나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종국에 우리가 변화할 몸의 첫열매로서 예수께서 보여주신 부활에 있음을 교회가 얼마나 잊고 지냈는지를 안다면 그런 질문이 얼마나 상황 파악 못하는 질문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영적"이라는 수식어로 잃어버린 역사적 차원의 문제에 천착하기 위한 노력가운데 우선해야 할 것이 우리의 소망의 근거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플라톤의 망령에 사로잡혀 영이 둥둥떠다니는 천국에 소망을 두는 것은 성경적이지도 않을 뿐 더러 우리의 삶에 "아편"이상의 기능을 감당하기 어렵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예수께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다스림(하나님 나라)이 예수를 바라보던 군중들에게 그가 가르치는 새로운 종교가 "아편"이라는 비판을 받은 적이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하게 영적인 원천을 가진 역사적 실체였기 때문이다.
예수가 당한 욕은 세상이 의지하는 권세의 근저에 도전했고 기득권자들의 소유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힘의 논리에 근거한 세상의 꼬라지를 바로 잡으려는 시도 때문에 당한 욕이다.

그가 보여준 도전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욕을 모두 당하는 연약함이었다. 그러나 그 연약함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고 권세있는 방법이었다. 비록 실패같아 보이지만 그것이 실패가 아니라 궁극적인 승리였음을 보증하는 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고 책을 읽어보자. "부활"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하기 위한 19세기의 시도는 갸륵하지만 1세기 유대에서 '부활'이 의미하는 바를 기억한다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심리적으로 부활을 설명하는 것은 1900년의 시간적 간격을 완전히 무시하는 소치가 되겠다. (고맙게도 라이트는 그의 책 『하나님 아들의 부활』에서 소상히 부활에 관한 논의들을 담고 있다. 1000쪽이 넘는 분량을 소화하고나서 역사성을 운운하자)

바울은 이 부활을 "첫열매"로 표현한다. 왜냐하면 그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지막 때에 그 몸을 입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유일한 역사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할 보편적 사건이 될 것이다. 죽으면 천국에서 부활한다는 짬뽕식의 논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인지를 알기 위해 신약성서를 모두 읽을 필요도 없다. 계시록 20장 이후만 읽어본 일이 있다면 천국에서 부활한다는 주장이 얼마나 무지의 소치이며 귀동냥의 소치인지 깨달을 진저!

소망의 근거가 부활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부활이 육체성을 가진(우리의 육체와는 다른-초신체성-라이트의 term) 부활이므로 우리의 노력과 삶의 소망은 이 땅에서 그의 나라를 위한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어야 하며 세속적 정치, 사회, 문화가 '죽음'을 최후의 위협을 삼아 우리를 굴종시키려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궁극적으로 부활할 것이기에 죽음 너머까지 연속성을 가지는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 비록 작은 수고라 하더라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 걸음에 우리의 목적지에 다달을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읽기가 향후 그리스도교의 형편과 처지를 대단히 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을 믿는다. 죽음도 불사하는 강직함을 갖고 하나님 나라를 증언했던 초대교회가 먹었던 욕과는 질적으로 다른 욕을 먹는 지금의 기독교인의 모습 속에 무엇이 빠져 있는지를 곰곰히 생각해 볼 때이다.

부활절에만 듣는 부활의 의미가 우리 신앙 전체와 어떻게 관련이 있고 우리의 삶에 어떠한 소망을 제기하는 지 궁금한 사람들은 필독이다. 라이트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는다.
illseo.net2009-07-09T04:29:52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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